PEOPLE 당신의 눈을 믿지 마라 말하는 아티스트 레안드로 에를리치

아르헨티나 출신의 아티스트 레안드로 에를리치는 거대한 설치물에 착시 효과를 주는 거울, 유리, 스크린 등의 장치를 적용해 생경한 풍경을 창조한다. 이처럼 우리의 감각기관은 주변 환경이 조금만 변해도 대상을 다르게 받아들인다. 불완전한 인간의 오감, 그중에서도 ‘시각’으로 파악한 세계에 의심을 품으라 말하는 그가 현실을 인식하는 방법에 대하여.

2022.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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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는 것 너머의 세계

사람들이 건물 난간에 매달린 동시에 누워 있다. 모순된 이 문장은 아르헨티나 출신의 아티스트 레안드로 에를리치(Leandro Erlich)의 작품 ‘바티망(Batiment)’ 속에서는 성립할 수 있다. 작가는 자신의 캔버스이기도 한, 실제 크기의 모형 건물 파사드를 바닥에 깔고, 그 앞에 거대한 거울을 45도 각도로 설치했다. 거울을 바라보며 힘겹게 매달린 듯 잔뜩 포즈를 취한 관람객들은 물감을 대신해 캔버스를 채운다. 일본 가나자와 ‘21세기 미술관(21st Century Art Museum)’에 상설 전시 중인, 유리를 이용해 관람객들이 물 안에 잠긴 듯 연출한 ‘수영장(Swimming Pool)’, 창을 바라보면 대각선의 반대 창에 자신의 얼굴이 비치는 ‘잃어버린 정원(Lost Garden)’, 실제 공간에 놓인 교탁, 책상, 의자 사이즈의 박스를 이용해 포즈를 취하면 한쪽 벽면을 차지하는 스크린에는 폐교의 한 교실처럼 비치는 ‘교실(Classroom)’ 등 그의 작품은 착시 효과를 이용해 물리적 법칙을 거스르는 낯선 광경을 만든다. 2012년 송은 아트스페이스에서 개최한 <Inexistence>를 시작으로 2014년 국립현대미술관 서울 <한진해운 박스 프로젝트 2014: 레안드로 에를리치>, 2019년 서울시립 북서울미술관 <그림자를 드리우고> 까지 국내에서 총 3번의 전시를 진행한 그가 4번째 개인전 <바티망(Batiment)>을 개최했다. 한·아르헨티나 수교 60주년을 기념해 기획된 이 전시는 12월 28일까지 노들섬 복합문화공간에서 열린다. 이번 개인전에서는 ‘바티망’, ‘잃어버린 정원’, ‘교실’을 비롯해 지하철 창 프레임 속에 전 세계 도시의 풍경 영상이 펼쳐지는 ‘세계의 지하철(Global Express)’, 낮과 밤 비행을 즐기는 듯한 기분을 느낄 수 있는 ‘비행기(El Avio´n)’와 ‘야간 비행(Night Flight)’ 등을 만날 수 있다. 

 

 

Leandro Erlich, ‘Swimming Pool’, 1999, 21st Century Museum of Contemporary Art, Kanazawa, Japan, 2014, Photo: Keizo Kioku Courtesy: 21st Century Museum of Contemporary Art, Kanazawa 

 

 

한국에서 벌써 4번째 전시입니다. 감회가 어떠한가요? ‘감사합니다. 그리고 안녕!’(서면 인터뷰를 진행한 그는 이 문장을 한글로 적어 보냈다) 한국어로 많은 말을 하고 싶은데, 좀 더 배울 걸 아쉽네요. 한국 관람객은 항상 제 작품을 따뜻하게 맞이해주세요. 높은 안목과 작품에 대한 존중이 느껴지는 관람 매너로 감상하시기에 한국에서의 전시는 늘 만족스러워요. 


이번 개인전을 통해 국내에서 처음 전시한 ‘바티망’은 2004년 파리에서 최초로 공개한 이래 런던, 베를린, 도쿄, 상하이 등에서 18년간 꾸준히 선보였죠. 타 도시에서는 지역의 특성을 반영한 파사드를 설치한 걸로 알고 있는데, 이번 전시작은 파리에서 처음 선보인 작품인 게 조금 아쉽네요. 너무 서운해하진 마세요. 파리 전시작은 ‘건물’의 가장 전형적인 파사드이기에 보편성을 지니고 있어 더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요. 어린 시절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조셉 코수스(Joseph Kosuth)의 작품을 관람한 적이 있어요. 미국 출신 작가 코수스는 언어에 기초한 개념 미술 작업을 선보이는데, 당시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Jorge Luis Borges)의 작품 속 문장을 인용한 작업을 전시했죠. 저는 그때 전시에서 아르헨티나 소설가의 문장이 아닌, 조셉 코수스의 출신 국가인 미국 작가의 문장을 인용했다면 오히려 더 흥미롭지 않았을까 싶었어요. 이번 전시 출품작 선택은 그때의 기억에서 비롯됐죠. 물론 추후 한국의 전통적인 건물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작업하고 싶은 마음은 충분하답니다. 


‘바티망’은 물론, 이번 전시에서는 사진으로만 선보이지만 ‘수영장’ 등 실제 크기의 작품이 많아요. 전시 공간에 제한이 생길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부분 작품의 규모가 크네요.  ‘스케일(Scale)’은 인간을 기준으로 한 도량이에요. 관객을 작품 속에 참여시키려면 대규모 작업이 필수불가결하죠. 건물 파사드가 실제 사이즈여야 인물이 그 위에서 포즈를 취했을 때 현실처럼 느껴질 수 있으니까요. ‘바티망’뿐만 아니라 ‘교실’, ‘세계의 지하철’, ‘비행기’, ‘야간 비행’ 등도 모두 실제 책상과 의자, 지하철과 비행기의 창 크기와 동일해요. 노들섬 복합문화공간에서 전시를 진행하기로 결정한 것도 공간의 조건이 큰 영향을 미쳤죠. 2층이지만, 메자닌 구조로 일부가 뻥 뚫려 있어 ‘바티망’을 설치할 수 있었어요.

 

 

Leandro Erlich, ‘The Classroom’, 2017 © Ms. Jackson 

 


실제 사이즈에 기반한 설치작에 거울, 유리, 스크린 등의 장치로 시각적 왜곡을 주어 현실과 환상을 넘나드는 작품을 감상하다 보니 ‘인간의 감각기관은 이토록 불완전하구나’란 생각이 들더라고요. 오감 중에서도 특히 작가님이 집중하는 ‘시각’에 대해 어떤 견해를 가지고 있나요? 소크라테스는 우리가 가장 신뢰하는 감각기관은 시각이라 말했죠. 우리가 세상에 대한 지식을 쌓는 데 가장 큰 기여를 하고요. 수 세기를 거치며 우리는 사진, 영화, 텔레비전 등을 개발하고 보다 복잡한 시각적 표상을 만들며 더욱 발전해왔죠. 그러나 ‘본다’는 행위는 ‘눈’으로만 이뤄지지 않는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돼요. 뇌에서 이루어지는 인지 절차를 거쳐야 비로소 볼 수 있으니까요. 관찰과 추상적 지식, 그리고 문화적 관념이 복합적으로 어우러지는 과정이고 이러한 개념은 시대상에 따라 꾸준히 변화해요. 


그렇다면 작품 속에서 이뤄지는 시각적 왜곡은 우리의 눈에 보이는 것을 믿지 말라는 메시지인가요? 보이는 것을 믿을 수 없게 만들어 의문을 갖게끔 의도한 것이 맞아요. 작품뿐만 아니라 일상 속 풍경에 대해 의심을 갖고 물음표를 던지는 행위는 현실을 더 잘 파악할 수 있는 방법 중 하나라고 생각해요. 


착시 효과를 만드는 작품 외에 계단이 벽면에 붙어 있는 등 기존의 물리적 질서를 바꾸는 작품도 선보이곤 하죠. 물리적 질서를 바꾸는 것은 ‘불가능’이란 개념과 연결돼요. 예를 들어 ‘난다’는 걸 생각해보세요. 비행기가 탄생하기 전까지는 상상할 수 없었죠. 지금은 당연시되는 것들 중 많은 일이 과거엔 불가능했어요. 지금 우리가 인지하는 세상은 본연의 모습일 수도 있지만, 아닐 수도 있다는 이야기죠. 그러니 감각을 신뢰하되, 틀에 박힌 확신에 의존하지 않아야 해요.


현실과 환상, 가능과 불가능, 허구와 진실, 주체와 타자 사이의 관계를 모호하게 보여줘 이분법적 사고에 반기를 드는 작품들로 전하고 싶은 메시지는 무엇인가요? 특정 메시지를 전하고자 한 건 아니에요. 그저 관람객이 노는 것처럼 작품에 참여하고 상상하고 생각하게끔 유도할 뿐이죠. 제 작품에서 관람객은 관객, 배우, 해설가 역할을 모두 수행해요. 궁극적인 메시지는 관객의 해석에 달려 있죠.


이번 전시에서 관람객이 꼭 놓치지 않길 바라는 작품이 있다면요? 전부 다요. 물론 모든 작품이 신나고 재밌지만은 않을 거예요. 그러나 이것은 작품의 완성도의 차이가 아닌, 서로 다른 가치를 다루기 때문이에요. 모든 작품에 몰입해 있는 그대로 즐기시길 바랍니다. 

 

 

Leandro Erlich, ‘The Staircase’, 2005 © Leandro Erlich Studio

 

 

현대미술계에 혜성처럼 등장한 이방인

레안드로 에를리치의 행적을 조사하면서 흥미로웠던 부분 중 하나는 그의 데뷔 과정이었다. ‘독학 후 1998~1999년 미국 텍사스주 휴스턴의 예술가 레지던스 코어 프로그램에 참여한 뒤 뉴욕의 한 상업 갤러리에서 개인전 진행’. 대규모 설치 작품을 스스로 공부해 구현한 것도 놀라운데 이후의 이력 역시 혀를 내두르게 만들었다. 그는 2000년 휘트니 비엔날레에 작품 출품 이후 파리, 런던, 마드리드 등 수많은 도시에서 전시를 열었다. 2001년 베니스 비엔날레에는 아르헨티나 대표 작가로 참여해 그 유명한 작품 ‘수영장’을 선보이기도 했다. 이 모든 일을 불과 3~4년 만에 해냈다. 현재 그의 작품은 영국 테이트 모던 미술관, 파리 퐁피두 센터, 부에노스아이레스 현대미술관, 로마 현대미술관, 휴스턴 미술관 등 세계적인 기관과 개인이 소장 중이다. 2016년에는 관념미학어워드(GNMH Award)를,  2017년에는 ‘대척점의 항구(Port of Reflections)’로 노이버거상(The Roy R. Neuberger Prize)을 수상했다. 2019년에는 아트 바젤 마이애미에서 모래 자동차 66대를 설치한 초대형 작품 ‘중요함의 순서(Order of Importance)’로 크게 주목 받기도 했다. 정규 미술 교육과정을 거치지 않고 어느 날 현대미술계에 불쑥 등장한 레안드로 에를리치. 쉬지 않고 놀라운 작품을 선보이는 그에게 어떠한 것들이 영향을 미치는지 궁금해졌다.

 

 

Leandro Erlich, ‘Noeud’, 2018 © Leandro Erlich Studio

Leandro Erlich, ‘El Avión’, 2011 & ‘Night Flight’, 2015 © Leandro Erlich Studio

 


아티스트로 데뷔하기까지 어떠한 과정을 거쳤는지 궁금합니다. 사실 아티스트로서 첫 데뷔는 1990년에 했어요. 열여덟 살이던 당시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레콜레타 문화 아트 센터(Centro Cultural Recoleta and Art Center)’에서 첫 개인전을 가졌거든요. 이력서에는 잘 쓰지 않는 내용이죠. 고등학교 졸업 후 미대에 진학했지만 첫해에 자퇴했어요. 추상 미술이나 조형 미술 위주의 담론을 펼치는, 학교에서 가르치는 미술에 대한 관점이 너무 진부하다고 생각했거든요. 이후 철학 공부를 하려고 3년간 대학교에 다녔습니다. 휴스턴으로 이전하기 전까지는 여러 예술 프로그램에 참여했고 마침내 미국 텍사스주 휴스턴의 예술가 레지던스 코어 프로그램에 합류했죠. 그러고 나선 다니던 학교를 그만뒀어요. 배우는 것에 목적이 있었지 학위에는 관심이 없었으니까요. 


독학으로 미술을 공부했기에 유년 시절과 학창시절의 환경이 현재의 작품 세계에 특히 큰 영향을 미쳤을 것 같은데요. 아버지는 건축학자, 어머니는 지리학자였어요. 어떠한 이야기를 작품으로 표현하기 위해서는 그 내용을 아주 잘 알고 있어야 하는데, 부모님의 직업은 공간을 표현하는 현재의 작품을 만들게 된 데에 큰 영향을 미쳤죠. 또 10대 시절 정말 많은 영화를 봤어요. 1500편 이상의 비디오를 소장하기도 했죠. 시네필로 보낸 어린 시절 또한 제 작품 세계에 큰 영향을 미쳤어요. 관객이 배우처럼 작품 속에 녹아들어 직접 표현하도록 유도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죠.

 

 

Leandro Erlich, ‘Maison Fond’, 2015 © Leandro Erlich Studio 2 Leandro Erlich, ‘The Democracy of the Symbol’, 2015 © Leandro Erlich Studi

1 Leandro Erlich, ‘Pulled by the Roots’, 2015 © Leandro Erlich Studio 2 Leandro Erlich, ‘Furniture Lift’, 2013 © Leandro Erlich Studio

 


이번 전시도 흥미진진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서울시립 북서울미술관에서 진행한 전시 <그림자를 드리우고>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 <한진해운 박스 프로젝트 2014: 레안드로 에를리치>에서 선보인 전시들도 인상 깊었어요. <그림자를 드리우고>에서는 남한과 북한의 관계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작품 ‘구름(남한, 북한)’, 무영탑 설화에서 영감을 얻은 작품 ‘탑의 그림자’ 등 한국의 사회 문화적 특성을 반영한 작품들을 공개했어요. 전시를 위해 한국 사회의 이슈를 공부하며 결국 이는 어디에나 있는 문제라는 걸 다시 한번 되새기는 소중한 시간이었죠. <한진해운 박스 프로젝트 2014: 레안드로 에를리치>에서는 바다 수면에 배가 비치듯, 그러나 실제로 수면 위 배와 대칭되게 아래로 또 다른 배를 설치한 ‘대척점의 항구’를 전시했어요. 부에노스아이레스와 서울이 지구 정반대편에 있다는 사실에서 출발한 작품으로 뒤집어진 세계를 만들어내, 수면에 반사된 형태의 이중성을 보여주고자 했죠.

 

 

 


모래로 66대의 자동차를 만든 작품 ‘중요함의 순서’는 현시대 교통 상황과 환경문제에 대해 말하죠. 시각에 대해 의문을 갖게 하는 다른 작품들은 ‘개인’에 치중한다는 느낌이 강했는데, 이 작품을 보고 최근 들어 작품의 관심사가 확대된 것인지 궁금하더라고요. 제게 중요한 것은 ‘현실’이에요. 그래서 늘 일상 속 많은 이슈에 관심을 가지고 있고, 현실의 일부인 환경문제 역시 마찬가지고요. 일상 속 문제에 대해 경각심을 갖는 것은 아주 중요해요.

 

작가님의 작품은 보는 이로 하여금 많은 것을 생각하고 행동하게 만드는 것 같아요.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예술의 역할은 무엇이라 말하고 싶나요? 저에게 예술은 민감한 사고를 하게 하는 작업이에요. 때론 세계를 탐험하게 하고, 철학적 질문의 물꼬를 트기도 하죠. 사람들을 하나로 결집시키거나 영감을 자극해 새로운 아이디어를 떠올리게도 하고요. 그리고 무엇보다 예술은 시대성을 담고 있어요. 과거에 완성된 작품을 보면서 우리는 당대의 사람들이 어떤 삶을 살아갔는지 상상하잖아요. 이 또한 예술의 중요한 역할이라고 생각해요.    

 

cooperation 미쓰잭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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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DIT

EDITOR : 양혜연PHOTO : AN JISUP(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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