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EOPLE 일곱 번째 여든 살

연극 <해롤드와 모드>를 80세까지 공연하고 싶다고 말해온 배우 박정자의 꿈이 이뤄졌다. 오는 5월 윤석화의 세련된 연출로 선보일 이번 공연은 그가 선사하는 마지막 모드가 될 것이다. 한창 연습이 이뤄지는 대학로 연습실에서 그를 만났다.

2021.0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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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들어 처음으로 기온이 20℃가 넘은 3월의 어느 날 배우 박정자를 만나고자 대학로에 있는 연습실을 찾아갔다. 코로나19 이후, 대학로는 이전에 비해 많이 한산했지만, 백신 보급과 함께 조심스럽게 움직이는 기운을 느꼈다.  


<해롤드와 모드>는 작가 콜린 히긴스의 시나리오를 바탕으로 한 동명 영화로 먼저 알려졌는데 1973년 다시 히긴스 자신이 연극으로 만들어 무대에 올렸다. 한국에서는 1987년 김혜자, 김주승 배우를 중심으로 초연되었고, 이후 여섯 번의 공연 모두 박정자가 모드를 연기했다. 2003년 첫 공연에서 박정자는 “여든 살까지 매년 이 작품을 공연하고 싶다. 그리고 80 되는 날 나 역시 모드처럼 끝낼 수 있다면 아름다울 것”이라고 말했다. 꿈이 이뤄지는 때를 곧 앞두고 있다.  


우리가 짧지 않은 시간 알고 지냈는데 이런 장소에서 뵙는 건 처음이네요. 이번 작품은 선생님께 여러 의미가 있을 텐데, 제일 특별한 소회는 무엇일까요? 그런 건 없어요. 어떤 작품이든지, 다 소중하고 특별해요.   


하하하, 그러게요. 요새 연습하느라 많이 바쁘실 텐데, 어떻게 지내세요? 이번 공연을 준비하면서 다시는 꾸고 싶지 않은 악몽을 두 번이나 꾸었어요. 아마도 강박감 때문이 아닐까 싶어요.


어떤 꿈이었어요? 첫 번째 꿈은 내가 무대에 나가야 하는 순간이었어요. 다른 배우들은 다 준비가 되어 있는데, 나만 대사도 의상도 그 어떤 것도 준비된 게 하나 없는 거예요. 눈앞이 캄캄한데 하여간 내 차례가 돼서 등 떠밀리다시피 무대로 나갔어요. 정말 죽고 싶다는 생각마저도 사치 같은, 그냥 연기처럼 딱 사라지고 싶은 기분이었어요. 뭐라고 표현할 말이 없는… 그냥 없어지고 싶다. 꿈에서 깨어났는데도 얼마나 무섭던지 다시 잠들지 못했어요. 또 한 번은 바로 며칠 전이었죠. 이번에도 내가 무대에 서 있는 거예요. 나는 아무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고 했더니 연출가가 대본을 무대 위에서 바로 주고 가는 거야.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이야. 대본이 처음 보는 암호로 되어 있는 거예요. 어떻게든 읽어보려고 하는데, 세상에 조명이 대본에 곧바로 쏟아져 내려서 그 암호 대본마저도 잘 보이지가 않더라고요. 정말 눈앞이 캄캄하고 너무나도 두려웠어요. 그때도 깨서 다시 잠들지 못했어요. 이런 꿈을 꿀 때면, 심지어 꿈인 걸 알면서도 너무 괴로운 심정을 이루 말할 수가 없어요. 아무리 꿈이지만 정말 살해당하는 것처럼 괴롭다고 할까? 정말 억울한 기분이 들어요.


듣기만 해도 무서워요. 왜 그렇게 힘든 꿈을 꾸실까요? 연극이란 여러 사람 작업이라, 호흡을 맞추는 게 걱정이지요. 연극은 편집이 아니잖아요. 준비부터 공연까지 누구 한 사람만 잘한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요. 출연진이나 무대 위의 사람들도 한 호흡으로 준비하고, 또 매일 공연을 올려야 하니까. 모두가 함께 끝까지 잘해내야 한다는 걱정 때문에 그러는 거 같아요.


선생님도 아직 무대가 떨리고 걱정이 많은가 봐요. 보통은 박정자 하면 워낙 오래 연기를 해오셔서 긴장하지 않을 것 같은데요. 오히려 갈수록 더 떨려요. 지금까지 많은 공연을 하면서 내 생각에도, 혹은 관객이 봤을 때 잘한 날도 있고 못한 날도 있잖아요. 그런데 떨림은 일종의 두려움인데, 연기에 대한 평가보다 실수에 대한 두려움이 나이가 들수록 오히려 더 커져요. 내가 이런 이야기를 하면 정말이냐고 반문하는데, 맞아요. 정말 두려워요. 인간은 누구나 실수할 권리가 있다는 말을 우스갯소리로 하지만, 그건 남들 사정이고. 난 내 공연에서 실수할까봐 정말 두려워요.

 

그 정도로 두려워하실 줄은 몰랐어요. 선생님은 무대 위에선 누구보다 당당하시거든요.
실수를 안 하려고 노력하는 거예요. 그래도 실수하곤 해요. 물론 관객은 실수인 줄 모를 때도 있지만 나 스스로는 알잖아요. 그래서 실수는 늘 두려워요. 무대 위의 실수는 내게 잊히지 않는 상흔이랄까? 상처와 흔적으로 남아요. <해롤드와 모드>에서 모드가 “가장 두려운 것은 사람이 사람다워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해요. 어떤 두려움이든 우리는 두려움을 느끼죠.

 

 

 

힘들게 자신과 마주하면서 작품 준비를 하시는군요. 이번이 몇 번째인가요? 2003년에 처음 이 작품을 했어요. 속으로 내가 정말 80이 되었을 때 80의 모드를 할 수 있을까? 해보고 싶다라는 생각을 했어요. 그 이후에도 몇 번을 더 했고, 이번이 7번째예요. 


 2003년에 태어난 아이가 지금 해롤드의 나이인 19세가 되었네요. 선생님은 정말 80의 여배우가 80인 주인공 역을 하시고요. 건강과 여러 가지 조건이 맞아떨어져야만 이루어지는 꿈인데, 정말 대단한 일이에요. 진심으로 축하드려요. 지금까지 내 연극 무대를 함께한 많은 사람들과 친구들이 있어요. 그 소중한 사람들과의 약속을 지킨 것이라서 더 감사해요. 하루에도 감사할 일이 얼마나 많은지 그래도 모두와 함께한 약속을 지킬 수 있어서 고맙죠. 


선생님께서 워낙 어른이시라 다른 분들이 함께 하는 게 영광이면서도 조심스러울 거 같아요. 그러게 말이야… 그런데 내가 무서워요?


솔직히 좀 무서워요. 아니, 내가 왜 무서워요?


사실 사석에서 뵈면, 소녀처럼 작은 것에 활짝 웃으시고, 감동받으시는데, 그래도 뭔가 무서운 느낌이 들어요. 일단 목소리가 주는 느낌이 단호하고, 준엄하니까. 그럴 수도 있겠네요. 내가 마음에 없는 말 하거나, 이리저리 흔들리거나 하진 않아요. 그리고 또 다른 점은요?


선생님은 대충 넘기는 면이 없으셔서, 실수하면 안 되겠다 싶은 생각이 드니까, 무섭다기보다 ‘어렵다’는 말이 맞을 거 같네요, 한편으로 존경심을 느낀다는 뜻이겠죠. 여자로, 일하는 사람으로, 문화계 인사로, 선생님의 지난 행보라고 할까, 업적이라고 할까….   주위에서 나를 무서운 사람으로 보는데, 그 때문에 어른스럽게 처신해야 한다는 생각을 늘 하게 돼요. 예를 들어 함께하는 일에 뭔가 어려운 일이 닥쳤을 때, 내가 그 고개를 넘을 수 있게 이끌 수 있는 어른. 내가 하는 일이 여러 스태프와 창의적인 사람들이 함께하기 때문에 크고 작은 충돌과 어려움이 발생할 수 있어요. 그럴 때마다 어른다운 어른이어야 한다고 스스로 많이 생각해요. 날 보고 롤모델이라고 하는 사람이 종종 있는데, 사실, 이 연극의 모드가 내게는 롤모델이에요.


모드에 대해서 말씀해주세요. 모드는 진짜 무소유의 사람이에요. 뭐든지 남이 안 쓰는 거 갖다 쓰고, 자기 것은 특별히 사거나 만들지 않아요. 그런 모드는 정말 불완전한 나이인 19세의 해롤드를 만나게 되죠. 해롤드가 모드를 만나서 인생에 대해 배우듯이 나는 모드를 통해서 무소유가 주는 자유로움과 죽음조차도 인생의 한 순환일 뿐임을 느꼈어요. 그래서 내가 금년에는 화분을 사지 않았어요. 분갈이, 물주기 같은 것에서 자유로워지고, 거리에서 보는 나무와 꽃을 더 자유롭게 즐기면 된다고 생각한 거죠. 진짜 무언가를 갖지 않으려는 마음이 가장 자유로운 영혼 아닌가요? 그리고 죽음도 그래요. 연극에서 모드가 죽을 때 관객마저도 슬퍼하지 않아요. 삶의 순환 과정 중의 하나니까. 나는 그런 그녀가 부럽고, 그래서 내 롤모델이에요. 이번 연극에 필요한 소품들도 역시 다 내가 쓰던 것들을 사용했어요. 나의 스토리가 있는 그 물건들이 나와 모드를 만들어가는 거지요. 나는 나이가 들어가면서, 내가 미인이라 일찍 다 드러나버리지 않은 게 얼마나 다행인가 싶은 생각이 들어요. 요새는 뭐든 빨리, 최연소로, 이런 것들이 화두잖아요. 하지만 다 드러나버리는 나이가 어리면, 그게 꼭 그리 좋은 건가요? 


모드는 멋진 영혼이네요. 자신이 롤모델인 인물을 준비하시는데 어떤 점을 신경 쓰세요? 자제하는 거죠. 예를 들어 신발이 너무 화려하면, 죽음조차 준비된 모드에게 신발의 표정으로 눈길이 가버리게 되니까요. 모드를 나만큼 알 사람이 있을까 싶은 마음으로, 의상, 소품을 다 준비하고 있어요. 모드는 그 어떤 것도 강요하지 않는 무소유의 삶 자체예요. 심지어 생명의 소중함도 강요하지 않아요. 그런 모드가 좋아하는 이야기가 몇 가지 있는데, 음악, 새, 꽃… 이런 이야기를 좋아해요. 모드는 음악을 우주의 춤이며 세계의 언어라 하면서 누구도 악기 하나쯤은 다룰 수 있어야 한다고 하는데, 내가 그건 못하네요.


이 작품은 이번이 마지막으로 더 이상 안 하실 건가요? 떠날 때는 가볍게 미련 두지 말고 가야지. 이 작품은 여기까지만.


이 작품 이후에 올해 다른 계획은요? 올 하반기에 뮤지컬 <빌리 엘리어트>에서 빌리 할머니 역을 할 거예요.


여러 작품을 하면서 다시 젊은 날로 돌아간다면 하는 생각이 들진 않으세요? 인생의 묘미는 변수에 있어요. 물론 그것 때문에 힘들기도 하지만, 그래서 다시 돌아가고 싶진 않아요. 인생을 장르로 말한다면 정말 코미디고 미스터리 같아요.

 

2003년 환갑을 지낸 다음 해에 <해롤드와 모드>를 처음으로 공연한 배우 박정자는 바라던 대로, 80세의 나이에 80세의 모드 역을 하게 됐다. 이것은 그저 우연일까? 나는 이 묘하고 신기한 상황을 진심으로 꿈꾸는 자가 노력으로 만드는 운명이라 믿는다. 코엘료의 <연금술사>에서 본 한 구절이 떠오른다. ‘당신이 무언가를 간절히 원하면, 온 우주가 이루어지도록 돕는다.’    

<해롤드와 모드>는 5월 1일부터 23일까지 대치동 KT&G 상상마당에서 공연된다. 

 

 

 

 

 

 

 

 

더네이버, 인터뷰, 배우 박정자

CREDIT

EDITOR : 신정희(안단태 디자인 대표, 문화 콘텐츠 기획자)PHOTO : 신사컴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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