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EOPLE 나의 서울, 강홍구의 서울

당신에게 서울은 어떤 곳인가. 서울에 살건 그렇지 않건, 한국의 수도이자 인구 938만의 대도시는 어떠한 인상을 남겼을 것이다. 사진작가 강홍구에게 서울은 ‘어디에나 있고 아무데도 없는’ 도시다.

2024.0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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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신안의 작은 섬 출신인 작가 강홍구는 오랜 시간 서울 곳곳을 기록해왔다. 기록할 의지를 품고 시작한 작업은 아니나, 흥미롭고 생경한 풍경을 촬영하다 보니 어느새 사료가 되었다. 대표작인 ‘은평뉴타운 시리즈’는 동네를 찍다 재개발이 시작되면서 아카이브 작업으로 거듭났다. 도시의 급격한 변화가 사진의 기록성을 강화한 셈이다. 
서울시립미술관은 작가가 기증한 불광동과 은평뉴타운 작업 컬렉션을 바탕으로 기획전 <서울 : 서울, 어디에나 있고 아무데도 없는 강홍구의 서울>을 8월 4일까지 개최한다. 가까이 북한산이 보이는 평창동 서울시립 미술아카이브에서 열리는 전시로, ‘서울’이라는 주제의 발전을 연대순으로 살피는 ‘강홍구의 서울 아카이브’와 매체 실험 작업에 집중한 ‘기록에서 기억으로’ 2개 섹션으로 구성된다. 
강홍구의 작품은 있는 그대로의 풍경을 충실히 담아낸 매끈한 사진이 아니다. 그는 여러 장의 사진을 파노라마로 길게 연결하되, 이음새를 어긋나게 붙여 시각적 균열을 의도한다. 사진 매체의 낭만화를 막고, 사유의 틈을 만들기 위함이다. 그렇기에 관객은 사진 속 풍경으로 진입하려다 발을 헛디디고 틈과 틈 사이에서 서성인다. 
인터뷰에 앞선 기자간담회에서 작가는 정착 초기 서울이 ‘연명과 생존’의 공간이었노라 술회했다. 현재에 이르러 그는 서울을 ‘어디에나 있고 아무데도 없는’ 곳이라 재정의한다. 서울의 파편은 한국 어느 도시에서나 찾아볼 수 있으며, 동시에 그가 기록한 과거의 서울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거대한 신기루 같은 서울을 해석하기 위해 그는 같은 장소를 반복해서 촬영하고, 사진을 이어 붙이고, 그 위에 물감을 덧칠했으리라. 기묘한 이미지를 사이에 두고 서울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강홍구, ‘서울 1985’, 2024, 지도에 복합재료, 56×80cm

 

서울시립 미술아카이브 건물에 들어서면 ‘잘 오셨읍니다. 여기서부터, 서울입니다’라는 옛 표지판 문구의 네온사인이 기다리고 있다.
1970~80년대 경부고속도로와 호남고속도로가 모두 연결되는 고속도로 톨게이트 표지판에 길게 쓰여 있던 문구다. 철자도 옛날 맞춤법이다. 1984년 서울에 정착했는데, 고속버스가 톨게이트를 통과하기 위해 속도를 늦추면 ‘어떻게 먹고살아야 할까’ 생각이 들었다. 서울에서 만난 사람들은 냉정하고 다소 몰인정하다고 느꼈다. 당시 신안에서 초등학교 교사를 그만두고 몇 푼 모아둔 돈으로 서울에 작은 화실을 인수했지만 잘되지 않았다. 그해 겨울 월세가 조금 밀려서 집주인을 만났는데, 말미를 달라고 사정했으나 기한 내에 나가라고 답하더라. 화실에 물을 떠놓고 잠들면 아침에 물이 꽁꽁 얼어 있을 정도로 추운 때였다. 그런 시절에 톨게이트 문구는 서울의 냉혹함을 떠올리게 하는 문장이었다.


문장을 네온으로 설치한 이유는 무엇인가? ‘힙’한 느낌 덕에 Z세대 관객이 좋아할 법하다.
처음에는 옛 스타일로 쓰거나 입체감 있게 만들면 어떨까 했다. 그런데 큐레이터가 네온을 제안했다. 노란색의 과거 서울 휘장과 흰색 글자가 잘 매칭되더라. 이 문구를 모르는 사람에게는 굉장히 신선할 것이고, 아는 사람에게도 색다르게 다가갈 것이다. 레트로풍인데 힙해 보이지 않나.


2024년 재작업한 1985년의 콜라주 지도가 가장 먼저 등장한다. 기업들의 위치로 도시를 구획한 작품이다. 사회 비판적 시선, 그리고 사진 위에 작업하는 방식이 드러나는 걸 보니 작품 세계의 출발점으로 느껴진다. 
그때는 전혀 의식하지 못한 지점이다. 어릴 적부터 지도 보는 것을 좋아했다. 지도책으로 서울을 구석구석 살피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서울 시내에 기업 빌딩이 많고 재벌들은 곳곳에 산다고 하는데, 우리 같은 사람은 언제 집 한 채 마련할 수 있을지 모르지 않나. ‘이 건물은 누가 갖고 있을까’ 궁금증이 생겼고, 잡지에서 로고를 오려 지도 위에 붙여보았다. 한참 그 작업을 잊고 있었는데, 이번 전시를 준비하며 돌이켜보니 서울을 작업 대상으로 인식한 것이 그때가 처음이었다. 그래서 다시 작업했다. 서울시민청에서 구입한 서울 지도 위에 잡지에서 오려낸 로고를 쫙 붙였다. 강북의 중심부와 강남에 기업이 몰려 있더라. 대기업 부지가 중요한 위치를 점했다는 게 드러난다. 또 예전에는 없던 외국계 회사나 자동차, 화장품 기업 등이 나타난 것도 큰 변화다. 로고는 평소 읽는 주간지나 미술 잡지 등의 광고에서 찾았는데, 일종의 ‘광고의 지리학’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컬렉션 사진집 <서울 : 서울 어디에나 있고 아무데도 없는 강홍구의 서울> 

 

2001년 은평구로 이사하며 근처 풍경을 담았고, 이후 불광동 뉴타운 시리즈가 시작됐다. 당시 불광동으로 이사한 이유는 무엇인가?
그전에는 부천에 살았다. 당시 부천에 작은 공장이 많았는데, 부천에서 야학을 차린 친구가 내게 미술 교사를 부탁하기에 그림을 가르치며 몇 년간 살았다. 그곳에서 김포공항 건설로 동네 전체가 사라진 오쇠리 풍경 등을 작업했다. 그러던 중 조건영 건축가가 불광동에 살던 집을 내놓았다. 가운데 중정이 있고 독립적으로 공간이 분리된 유럽풍 주택이었다. 집이 안 팔리니 미술계 사람들한테 좋은 조건으로 제안했고, 몇몇이 돈을 모아 그 집을 샀다. 다들 ‘이때가 아니면 언제 우리가 서울에 집을 가지겠나’ 한 거다(웃음). 그래서 2001년 불광동으로 이사했다. 복층으로 된 곳을 택해서 1층은 작업실로, 2층은 생활 공간으로 썼다. 살다 보니 주변 사진을 찍고 작업을 시작하게 되었다. 

 

서울을 주제로 작업을 줄곧 해왔는데 지금은 경기도에 거주한다.
불광동에서 살다가 느지막이 결혼하면서 고양시로 이사하고 작업실도 원흥역 근처로 옮겼다. 그곳도 예전에는 다 논밭이었는데 재개발되며 근처가 신도시로 변했다. 내가 찍고 나면 다 없어지나 보다(웃음). 농촌 풍경이 한 20년은 지속되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10년도 되기 전에 재개발이 된 셈이니 개발 속도는 인간의 상상을 뛰어넘는다. 고양의 창릉 3기 신도시도 한창 공사 중인데, 촬영해둬야 할 것 같아서 작업 중이다. 


‘미키네 집’, ‘수련자’, ‘순이’ 연작 등 오브제를 중심에 둔 작업도 해왔다. ‘미키네 집’이나 ‘수련자’는 위트가 느껴지는 반면, ‘순이’ 시리즈는 상경한 뒤 시골로 돌아가는 스토리나 한복 복식에서 애수가 느껴진다.
철거된 집에 들어가 보면 버려진 장난감이나 앨범, 가구, 그릇 등이 엄청나다. 다른 걸 수집할 수 없으니 장난감을 몇 개 주웠다. 그중 재미있었던 물건이 ‘미키네 집’과 ‘수련자’ 속 게임 캐릭터, ‘순이’ 인형이다. ‘순이’는 오른손에 숟가락, 왼손에는 깡통 같은 걸 들고 옛날 옷을 입고 있다. 얼굴은 원래 달랐는데, 크게 웃는 표정이 무서워서 다른 인형 얼굴을 꿰매 붙였다. 그래서 머리가 빨갛다. 인형을 서울역에서도 찍고, 백화점이나 유채꽃 핀 들판에서도 찍었다. 서울에 관한 스토리로 만들면 재미있을 것 같아서 먹고살기 위해 이곳저곳 돌아다니다 결국에는 다시 시골로 간 스토리를 짰다. 우리 또래와 전후 세대의 상경기에 대한 오마주라고 할까. 중학생 무렵인 1960년대 말부터 도시로 가는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섬에서는 몰래 배를 타고 가기도 했다. 보통 초등학교 졸업 후 서울로 가서 식당이나 공장에 취업했는데, 정착에 성공한 사례도 있지만 돌아간 사람도 많았다. 


그렇다면 순이도 고향으로 돌아간 것인가?
고향이어도 좋고 제3의 장소여도 좋다. 실제로는 못 갔는데 마음속에서만 간 걸지도 모른다. 

 

 

강홍구, ‘녹색연구-서울-공터-창신동 4’, 2019, 디지털 피그먼트, 아크릴릭, 200×560cm

 

전시와 함께 제작한 컬렉션 사진집에 “바위를 깎고 혹은 그대로 두고 지은 집들은 내게 경탄의 대상이었다”라고 메모를 남겼다. 
그 사진은 북한산의 집들이다. 북한산은 순 화강암인데, 산등성이의 바위와 바위 사이를 돌로 메우고 흙을 쌓아 평지를 만든 뒤 그 위에 집을 지은 것이다. 아마 무허가일 테고 기념비적인 건축으로 봐야 한다. 촬영하면서 좀 아까웠다. 열 채만 남겨두면 일종의 문화재가 되지 않았을까. 서울 외에 부산이나 목포, 통영 등지의 산동네를 찍기도 했다. 우리나라의 산동네를 누가 집대성해야 할 텐데. 한 번에 모아서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현재까지 작업해온 것이 많으니 작가님이 적임자 아닐까(웃음).
에너지가 허락할지 모르겠다. 항구 도시만 찍어도 재미있을 것 같다. 부산부터 통영, 여수, 군산, 목포 같은 항구 도시에 산동네가 꽤 있다. 예전에는 한 번에 2박 3일 동안 촬영했는데, 무릎이 안 좋아져서 예전처럼 종일 찍지 못한다. 


컬렉션 사진집의 사진들에서 집 안 풍경과 남겨진 물건, 벽의 낙서 등 거주자의 흔적이 드러난다.
처음에는 전체적인 외관을 주로 찍었다. 그러다 내부를 관찰하기 시작했다. 통상 재개발 지역으로 결정되면 인가가 끝난 뒤 철거 용역 회사가 결정되고, 그 회사는 고물상에 권리 일부를 준다. 고물상에서는 황동, 구리 등 금속을 수집해 간다. 구리 파이프 같은 걸 철거하면 창문이 다 깨지고 엉망이 되는데, 그런 일이 벌어지기 전에 비교적 온전한 상태의 집안을 찍으려고 했다. 


한복을 입은 섬뜩한 마네킹이 있는 무당집 풍경도 인상적이었다. 
정말 신기한 경험이었다. 그 무당집 옆집도 기억에 남는다. 서울에서 본 유일한 흙벽돌집이었는데, 불이 났었는지 불에 탄 양복이 걸려 있었다. 꼭 사람을 보는 것 같고 기이했다. 이들이 살아남기 위해 얼마나 애썼는지 드러나니 잊을 수 없다. 또 어떤 집은 회한을 담아 편지를 적어두고 갔다. 집에 대한 애착이 컸던 사람들일 것이다. 예를 들면 은평구에 한양주택이라는 곳이 있었다. 1972년 남북공동성명 당시 북한 사절단이 오가는 곳에 지은 시범주택으로, 유럽식 단층 주택이 그림처럼 펼쳐진 곳이라 당시 그런 집에 살아보고 싶은 사람이 많았다. 이후에 은평뉴타운 개발에 포함되면서 주민들의 저항이 컸지만 결국 사라졌다. 집에 애착을 가진 사람이 많았는데 말이다.

 

 

 

 

근처 풍경을 찍었을 뿐인데 이후 재개발이 계속되며 작업이 아카이브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고 이야기했다. 

첫 전시 때까지도 이 작업이 기록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기록할 의도가 없었고, 시간이 지나니 기록이 되겠다 느낀 것이다. 이것이 사진 매체의 신기한 점이다. 심지어 나는 다른 사람들처럼 한 컷을 온전하게 찍지 않는다. 파편화된 사진을 여러 장 이어 붙이는데도 기록이 된다. 시간이 지나 옛 사진을 찾고 분류하다 보니 사진의 기록적 특성이 저절로 강화되었다. 모이면서 당대 삶의 풍경이나 사회를 보여준다. 사진이 좋건 나쁘건 내가 찍은 것 이상의 의미를 갖게 된다는 걸 깨달았다. 


이어 붙이는 작업은 어떻게 이뤄지나?
모두 포토샵으로 작업한다. 1999년 디지털카메라를 구입하며 디지털 작업을 시작했고, 포토샵은 초창기 버전부터 사용했다. 회화를 전공했기에 초기에는 사진을 기반으로 작업하리라 상상하지 못했다. 1997년 첫 개인전을 하고서 ‘이 시대에 회화로 어떻게 적합한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의구심이 들었다. 예술혼에 불타는 예술가의 시대는 가고, 기존 정보를 재조직하는 일을 할 수 있겠다고 결론 내렸다. 그렇기에 다른 매체를 혼합하기 위해 1992년 컴퓨터를 샀다. 가장 저렴한 핸드헬드 스캐너도 구입해 다른 사람이 찍은 사진을 재구성했다. 그러다 내가 필요한 이미지를 얻기 위해 똑딱이 필름카메라로 찍기 시작했고, 이윽고 300만 화소 디지털카메라를 처음 구입했다. 


차츰 사진 작업이 메인이 된 것인가?
컴퓨터로 작업하려다 보니 가장 적합한 매체가 사진이었다. 동영상을 고민하기도 했지만 장비가 많이 필요하고 혼자 하기 어렵더라. 혼자 작업하는 체질이라 성향에 맞춰 매체를 결정했다.

 

 

강홍구, ‘그 집–불광3구역’, 2010, 디지털 피그먼트 프린트, 잉크, 아크릴, 190×550cm

 

컬렉션 사진집에는 촬영 당시의 기억을 되살린 손글씨 메모가 있어 읽는 재미가 컸다. 평소 기록을 꼼꼼히 해두는지?
일기를 본격적으로 쓴 지 15년 정도 됐다. 작업 과정을 기억하기 위해 쓰기 시작했다. 메모는 전시를 준비하며 새로 쓴 것이다. 장면을 보면 기억이 절로 떠오른다. 사진의 힘이 그런 것이다. 이미지가 기억을 환기한다.


이번 전시 포스터는 대표작의 배경인 재개발 지역, 산동네 풍경뿐 아니라 광화문 광장, 한강 등 서울의 상징적 장소가 등장한다.
전시 제목 모형을 오브제 삼아 서울 곳곳을 찍는 것은 디자이너의 아이디어였다. ‘그럼 내가 직접 찍겠다’고 동참했다. 북촌부터 남산을 거쳐 한강, 강남으로 방향을 정해 하루 동안 찍었다. 송현동 공터, 한강공원, 남산의 오래된 아파트 등 전시작과 연결되는 곳들을 촬영했다. 


이전 작업에서 서울의 녹색 공터에 집중하기도 했다. 송현동 공터는 처음 작업 당시와 달리 대중에 개방되었는데, 열린 모습을 보니 어땠나?
송현동 공터는 이전에 미국 대사관 직원 숙소였다. 그러다 직원들이 떠나고 한동안 공터로 있었다. 잡초가 무성할 당시를 촬영했다. 그때가 가장 좋았다. 만일 공터로 개방한다면 자연과 가까운 상태에서 길만 조성하고 내버려두길 바랐다. 잡초를 내버려둔 자연이 어떻게 변화하는지 보여주는 공간으로 말이다. 그런 장소가 지금은 전멸했다. 다만 선유도 공원 재개발은 좋은 사례라고 생각한다. 본래 자연을 그대로 두기도 하고 손을 대지 않은 상태 말이다.


전시 연계 프로그램 중 작가가 인터뷰어, 관람객이 인터뷰이로 참여하는 세션이 있다. 어떤 질문을 꺼낼 예정인가?
큐레이터와 농담처럼 이렇게 얘기했다. “서울은 당신을 얼마짜리로 평가할 것 같은가?”, “당신은 서울을 얼마짜리로 평가하겠나?” 생각해보면 서울은 내가 없어도 되지 않겠나. 혹은 “당신이 서울에서 최대한 얼마를 가질 수 있을 것 같나?” 같은 질문. 차차 고민하려 한다. 또 이후 ‘잡담회’가 예정되어 있다. 전시를 열면 대부분 작가가 전면에 부각되고 큐레이터가 조금 드러나는 정도다. 하지만 전시는 집단이 만든다. 이 정도 규모의 전시는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그래픽 디자이너, 공간 디자이너가 모여 이야기를 나누고 기록으로 남기고 싶어 제안했다. 두 번째 잡담회는 사진, 사운드, 동영상 등 여러 매체로 서울의 재개발을 담은 작가들과 모여 이야기하려 한다.

 

 

 

강홍구, ‘미키네 집-구름’, 2005-2006, 디지털 피그먼트 프린트, 90×260cm

 

서울에서 오랜 시간 살아왔다. ‘연명과 생존’의 공간에서 서울에 대한 인식이 어떻게 달라졌나?
어쨌든 서울은 나를 밥 먹고 살게 해준 공간이다. 지금 사는 곳은 경기도지만, 활동 공간은 서울이고 경기도는 내게 관심이 없다(웃음). 서울의 포용성, 그것이 서울의 힘을 보여준다. 그 점을 높이 산다. 지방 도시에 살아봤으면 알겠지만 답답하고 배타적이다. 서울은 훨씬 넓고 포용력이 있다. 어쩌면 권력과 경제력이 크기 때문에 그 힘을 끌어들이며 더 확장되는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이상한 도시다. 서울을 달리 보게 된 건 ‘1029 이태원 참사’가 계기였다. 159명이 사망했는데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사건을 지우려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예를 들어 대구의 참사는 ‘대구 지하철 참사’로 정확히 명명한다. 그런데 이태원 참사는 ‘서울 이태원 참사’라고 하지 않는다. 삼풍백화점, 성수대교 참사도 지역 이름을 붙이지 않고 마치 서울은 관련 없는 것처럼 명명한 뒤 그 사실을 재빨리 지워버린다. 


파편을 이어 붙인 사진의 균열이 사라지고 이음새가 매끄러워지는 날이 언젠가 올까?
가망이 없다. 이을 수 있겠지만 완전히 거짓말 아닐까. 다른 사진은 모르겠지만, 내 작업과 같은 풍경 사진은 이어질 것 같지 않다.


훗날 서울에 관한 전시를 한다면 ‘동사’ 형태로 묶고 싶다고 언급했는데. 
실제로 ‘먹다’는 1990년대부터 지금까지 찍어둔 사진이 많다. 초상권을 침해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인물 사진을 소개하고 싶다. 그 외에 ‘앉다’, ‘들다’, ‘서다’ 같은 동사로 엮으면 재미있을 것 같다. 


최근 작업 대상으로 주목하는 풍경이 있다면?
앞서 말했듯 항구 도시의 산동네를 다뤄야 하나 고민 중이다. 그리고 시간과 힘이 허락한다면 제주 해안 마을을 담고 싶다. 고향인 신안의 바닷가 집들과도 생김새와 구조가 확연히 다르다. 또 다른 주제로는, 내가 이사한 경험을 묶어서 전시하고 싶다. 세어보니 살면서 서른다섯 번 이사했더라. 중학생 시절부터 집, 근무지, 작업실 등을 옮겨 다녔다. 2012년에 이를 주제로 한 작업을 공개했지만, 모아보면 개인적 경험 이상의 것이 되지 않을까. 구체적 장소와 위치 등을 기록하면 어떨까 한다. 앞으로 전시를 몇 번이나 더 할 수 있을지, 에너지가 언제까지 지속될지 알 수 없다. 그러니 세상에 대해 하고 싶었던 중요한 얘기나 하자. 작가란 결국 매체가 무엇이든 자기가 보고 느낀 것을 이야기하는 사람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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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ITOR : 박지형PHOTO : 임한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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