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EOPLE 세필로 채운 사색의 길, 이현정 작가

프랑스 파리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아티스트 이현정의 개인전 <Ridge Lines>가 벨기에 브뤼셀의 갤러리 Sept에서 5월 19일까지 열린다. 무수한 선이 모여 거대한 능선을 이루는 그의 신작을 한데 모은 전시다.

2024.05.10
페이스북 트위터 링크

 

작품명 ‘Contemplation(묵상)’. 푸른빛 그림을 처음 봤을 때 그것이 바다라 인식했다. 해일처럼 역동적인 물결의 긴장감에 가쓰시카 호쿠사이의 목판화 ‘가나가와의 거대한 파도’가 떠올랐다. 고흐를 비롯한 인상파 화가들이 사랑했던 일본의 우키요에 작품 말이다. 가만 들여다보니 실은 산인가 싶다. 이번에는 겸재 정선이 그린 험준한 금강산이 겹쳐졌다. 지평선이 보이지 않는 첩첩산중은 땅의 대부분이 산인 한국의 흔한 풍경 아닌가. 누군가는 그의 작품에서 육중한 포유류의 살갗을, 그도 아니면 낯선 행성의 표면을, 또는 누구의 발길도 닿지 않은 길을 본다. 한지와 먹으로 작업하는 이현정 작가 이야기다. 화폭 속 패턴은 질서정연하면서 자유분방하고, 동적인 동시에 차분하다. 상반되는 두 가지 특징이 공존할 수 있는 이유는 그 형상이 자연을 닮아서가 아닐까? 자연이 무심하듯 추상과 구상의 경계에 있는 그림 역시 말이 없다.

 

 

 

이현정 작가의 작업실 풍경. 가는 붓과 직접 만든 물감이 눈에 띈다. 

 

작업을 마친 대형 작품 ‘Contemplation’. 

 

한지를 해체하다

그렇다면 비밀을 파헤치기 위해 작가의 작업 과정을 살펴보자. 주재료는 한지와 먹, 한국 전통 안료다. 먼저 한지를 물에 풀어 종이 반죽을 만들고 나무판에 얇게 펴 바른다. 그것을 건조하여 유일무이한 캔버스를 완성하는 것이 첫 단계다. 이후 먹과 안료를 활용해 세필 붓으로 가는 선을 긋는다. 기다림과 반복. 두 가지가 작업의 핵심 요소다. 
그의 작품이 평면을 넘어 관객에게 덮쳐오는 감각은 한지 배경의 양감과 질감에서 기인한다. 한지 반죽을 손발로 눌러 펴낸 결과 불균질한 이랑과 고랑이 형성되며 입체감이 생겨나는 까닭. 때문에 그의 작품은 육중하다. 두터운 유화 물감이 형성하는 마티에르와는 결이 다르다. 거칠고 성긴 텍스처는 익숙하게 여겼던 한지라는 사물을 다시 바라보게 한다. 작품 구상 단계에서 형태에 맞춰 볼륨을 계산하지 않을까 짐작했지만, 모두 우연의 산물이라는 것이 그의 답변이다. 가까이서 보면 양감이 더욱 두드러져 꼭 부조 조각 같다. 손을 뻗어 만져보고 싶다는 욕망이 불쑥 튀어나온다.
많은 재료 중 왜 한지였을까? 그는 오래전부터 한지에 매력을 느꼈다고 말한다. 한 전시 소개 글에서 이렇게 언급한 적이 있다. “한국에서의 과거부터 나는 조상의 물건에 대한 기억을 간직하고 있다. 한지는 그 기억을 감싸는 겹이다. 한지는 집 바닥을 뒤덮고 있었고 아이의 눈높이에서 그 풍경을 보았다. 종이에는 발자국, 즉 인생의 흔적이 남았다. 나는 이미 그림과 풍경을 상상하고 있었다.” 프랑스로 이주한 지 10년쯤 지났을까, 어느 날 그는 우연히 작업실 한편에 두었던 한지 몇 장을 발견했다. “처음에는 어린 시절 미술 시간에 종이죽으로 탈을 만들었던 방식을 이용했습니다. 그러다 점차 종이의 면적을 넓혔고 한지의 재질을 활용해 다양한 시도를 했죠. 본격적으로 시도한 건 2011년부터예요.” 오랜 해외 생활이 그의 기억을 유년 시절, 고향의 풍경으로 이끌었으리라. 
돌이켜보니 어릴 적 신문지를 물에 반죽한 뒤 탈 모양으로 빚고, 마르면 물감으로 색을 칠했던 것이 떠올랐다. 한국의 어린이들은 여전히 미술 시간에 이러한 체험을 한다. 아마 종이를 주물러 반죽하는 동안 무아지경에 빠져든 경험이 있을 것이다. 이현정 작가에게 종이를 만드는 시간은 곧 명상의 시간이다. 동시에 떠나온 고향, 한국을 향한 그리움과 사랑을 실감하는 시간이다. 
그는 한지와 먹, 안료를 늘 한국에서 직접 구입한다. 먹은 색의 농도가 강한 제품을 택한다. 물을 섞어 농담을 자유롭게 조절하기 위해서다. 안료의 경우 광물을 분쇄한 형태인 석채와 고운 흙으로 만든 분채를 아교와 혼합해 손수 제작한다. 석채는 거친 질감을 내는 데, 분채는 밀도 높은 채색을 하는 데 용이하다. 가장 중요한 한지는 닥나무의 섬유질이 많이 보이되, 얇게 잘 섞인 것으로 고른다. 한국에 들를 때마다 새로운 한지 장인을 탐색하는 것도 중요한 일과다. 

 

 

1 Lee Hyun Joung, ‘Chemins de Vie 1’, 2024, 150×50×3.5cm 2 Lee Hyun Joung, ‘Chemins de Vie 2’, 2024, 150×50×3.5cm

 

작업실 바닥에서 작업하는 모습. 

 

선이 모여 산이 되기까지

먹과 한지를 사용하는 수묵화에 다양한 기법이 존재하지만, 가장 익숙한 것은 역시 사군자다. 붓을 휘둘러 일필휘지로 난을 치는 장면은 미디어를 통해 흔히 접하는 수묵화의 예시 아닌가. 비교하자면, 이현정의 작품은 이 같은 선비들의 난초 그림과 정반대에 있다. 난초 그림이 순간의 에너지로 화폭 가운데 선을 긋고 여백을 강조했다면, 이현정은 가는 붓으로 무수한 선을 그려 화면을 촘촘히 채운다. 정밀함에서 짐작하듯 긴 시간이 소요된다. 종이 제작 과정이 명상의 시간이라면, 반복해서 선을 긋는 작업은 육체적, 정신적 수련과 같을 테다. “하루하루가 모여 인생이 이루어지듯 선 하나하나가 모여 조형미와 운동감을 형성합니다. 저에게 하나의 선은 그 이상의 의미예요.” 
셀 수 없이 많은 선이 모여 산등성이를 닮은 굴곡진 마루, 아스라한 바람의 흔적, 흩날리는 실타래와 같은 형태로 완성된다. 이 같은 운동성을 만들어내는 데는 유려한 선의 움직임과 더불어 흑색과 청색, 녹색 중심의 차분한 색상, 그리고 물감의 농담이 주된 역할을 한다. 그는 물의 농도를 조절함으로써 한 가지 색이 천 가지의 뉘앙스를 드러낼 수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 같은 작업은 주로 고요한 밤, 음악 속에서 진행된다. 

 

 

 

Lee Hyun Joung, ‘Mmoire du Vent Bojagi’, 2024, 195×130×3.5cm

 

작업실 풍경. 검은색과 붉은색 작품이 두드러진다.

 

플로리안 아라이브 대표와 이현정 작가.

 

다시 미술로 향하는 여정

대학에서 서양화를 전공한 작가는 1995년 졸업 후 파리로 무작정 떠났다. 20대 화가를 이국으로 향하게 한 원동력은 무엇이었을까? “부모의 보살핌 안에서, 태어나고 자란 익숙한 세상에서 벗어나 혼자 힘으로 무언가를 이루고 싶었어요.” 전 세계의 도시가 기회의 땅으로 열려 있었지만 그중 파리를 택했다. 프랑스어에 대한 매혹, 그리고 영화와 미술, 문학을 통해 접한 그곳 문화를 직접 체험해보고 싶다는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그가 곧장 전업 작가로 활동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생계를 위해 보석 디자이너로 일했고, 금세공을 배웠다. 회사를 그만두고 본격적으로 작업에 매진한 것은 40대에 접어든 이후였다. 그만큼 삶의 행로에서 느낀 것들이 자연스레 작품에 반영되었다. ‘사색’, ‘인생의 길’, ‘바람의 기억’, ‘침묵’. 이 같은 작품 제목은 치기 어린 시절을 지나 생을 돌아본 사람에게서 나올 법한 것이니. 어릴 적 부모를 통해 여행의 기쁨을 배웠다는 그에게는 자연으로 향하는 여정이 인생의 원동력이다. “시간이 허락하는 대로 자연으로 돌아가 에너지와 영감을 채웁니다.”
그러다 2018년, 작가는 갤러리 Sept의 설립자인 플로리안 아라이브(Florian Arab)를 만난다. 40대의 신진 작가와 20대 신진 갤러리스트의 만남이었다. 플로리안은 과거를 이렇게 회상한다. “당시 브뤼셀 사블론 지역의 공간을 계약한 상황이었어요. 본래 데커레이션 숍을 열 계획이었으나 갤러리로 바꾸었고요. 그때 제 결정은 신중한 계획보다는 열정에 따라 좌우됐거든요. 하지만 곧 깨달은 거죠. 갤러리는 있지만 전시할 작가가 없다는 것을.” 그때 플로리안은 인터넷을 검색하다 우연히 이현정 작가의 블로그를 발견했다. “파리에 사는 한국 작가가 자신의 작업을 온라인에 올려두었더라고요. 저는 그의 표현력과 작품에 담긴 영혼에 곧바로 매료되었어요.” 플로리안의 연락을 받은 작가는 그 주에 버스를 타고 브뤼셀에 도착했다. 가방은 작품으로 가득 차 있었다. 결정은 빠르게 이뤄졌다. 그렇게 파트너십을 맺은 이후 작가와 갤러리는 함께 성장해왔다. 협업 관계를 넘어 친구가 된 것은 물론이다. 이후 이현정 작가는 미술계에서 차츰 인지도를 쌓으며 컬렉터들의 주목을 받았고, 아트SG, 화랑미술제 등의 아트페어에서 매진을 기록하기도 했다. 갤러리 Sept 역시 신진 아티스트 발굴에 전념하며 2022년에는 해안 도시 크노케헤이스트에 두 번째 지점을 개관했다. “가장 멋진 점은 이제 세계의 컬렉터들이 마땅한 인정을 받고 있는 그의 작품을 찾고 있다는 거예요. 이현정 작가가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면 저도 행복해지죠. 그가 어느 때보다 만족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1, 2 Lee Hyun Joung, ‘Mmoire du Vent Gris Rouge’, 2024, 160×115×3.5cm 3 작품을 배경으로 한 포트레이트. 산과 바람에 둘러싸인 듯하다.

 

압도를 넘어선 치유

갤러리 Sept에서 진행 중인 개인전 <Ridge Lines>는 작가와 갤러리가 협업해온 지난 6년의 역사를 기념하는 전시다. 지난해 1월에는 더컬럼스 갤러리 싱가포르, 그리고 8월에는 더컬럼스 서울에서 전시를 했는데, 이번 전시에는 한결 다채롭고 스케일이 큰 신작을 모았다. 높이가 키를 훌쩍 넘는 대형 작품도 여럿이다. 산과 바다가 굽이치고, 실타래는 바람에 날려 생명체처럼 역동하는가 하면, 작은 물결 조각이 모여 누빔 보자기를 완성한다. 작품의 크기도 다양한데, 족자처럼 세로로 긴 대형 작품 ‘Symphonie en Trois Mouvements(3악장 교향곡)’가 단연 압도적이다. 천장에 매달면 바닥까지 늘어지는 길이로, 정면에서 바라볼 때 자연 한 가운데 서 있는 듯한 착시를 일으킨다. 그의 작품이 자연의 일부를 도려낸 것이라 상상한다면 화폭이 넓을수록 관람자가 압도당하는 건 당연한 이치다. “점차 큰 규모의 프로젝트에 이끌리는 것 같아요. 이번에 전시한 작품들도 대형 작업 중 하나이고요. 더 큰 캔버스를 두고 작업하는 일은 제가 예술적인 비전을 깊이 탐구하고 표현할 수 있도록 해주었습니다.”
해외에서 그의 작품은 한국 전통 재료와 모던한 접근법이 만나 독특한 파장을 일으킨다고 평가받는다. 그중에서도 유럽 현지 관객들은 특히 한지라는 재료의 특성, 그리고 작가가 손으로 직접 만든다는 점에 크게 관심을 기울인다고. “가끔 제 그림 앞에서 눈시울을 붉히는 관객이 있어요. 그림을 통해 자신의 인생을 뒤돌아보았다면서요. 그러한 모습은 제게 멈추지 말고 앞으로 나아가라는 메시지로 다가옵니다.” 기실 그의 목표는 한결같다. 자신의 그림을 통해 관람객이 내면을 들여다보기를. 그리하여 그가 작업 과정에서 얻은 명상과 사색의 시간을 되찾기를 바라는 것이다.   

 

 

 

 

 

 

 

 

 

더네이버, 피플, 인터뷰

CREDIT

EDITOR : 박지형PHOTO : Nick Verhaeghe(인물)

아이매거진코리아닷컴, 더네이버, 동방유행 ©imagazinekorea.com, ©theneighbor.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