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EOPLE 배우 이유영과 임선우의 새 얼굴

영화 <세기말의 사랑>에는 세 가지 전환이 있다. 1999년에서 2000년으로 넘어가는 세기의 전환, 흑백에서 컬러로 변하는 룩의 전환, 그리고 두 주인공 영미와 유진의 감정적 전환이다. 앞의 둘이 영화적 장치라면, 인물의 감정 변화를 이끄는 것은 배우의 역할이다. 태연하게 유연하게, 본 적 없는 인물을 연기한 배우 이유영, 임선우를 마주했다.

2024.0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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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선우가 착용한 오버사이즈 재킷과 화이트 셔츠, 플레어 팬츠 모두 렉토. 이유영이 입은 베이지 컬러 헌팅 재킷 렉토. 주름 장식 셔츠 YCH. 와이드 팬츠 앤아더스토리즈.

 

 

 

20세기가 저물어가는 1999년. 누군가는 새로운 밀레니엄을 기대했고, 누군가는 지구가 멸망한다는 예언에 기댔다. 임선애 감독의 영화 <세기말의 사랑>은 전 세계가 들썩이던 시기, 은밀히 멸망을 기대한 김영미의 일상을 비추며 시작한다. 치매에 걸린 큰어머니를 돌보며 작은 전자 제품 부품 공장에서 일하는 영미는 회사에서 남몰래 사랑을 키워간다. 늘 고개 숙인 채 목도리로 얼굴을 가리고 다니다가도 배송기사 구도영 앞에서 가끔 밝아진다. 경리과장인 영미는 도영의 수금 금액이 맞지 않음을 알아차리지만, 도영마저 모르게 모자란 돈을 메운다. 멀리서 상대를 지켜보며 자족하고 남몰래 그를 돕는 영미는 배우 이유영의 새로운 얼굴이다. 도회적이고 신비로운 캐릭터부터 밝고 활기찬 인물까지, 주저하지 않고 다양한 역할에 도전했지만 특유의 생기와 활력은 그의 존재감을 부각하는 특질이었다. 하지만 몸을 굽혀 자신을 감추고, 남 앞에서 목소리를 높이지 못하는 영미는 지금껏 한 번도 보지 못한 이유영의 모습이다. 그를 통과한 영미는 안쓰럽지만 보듬어주고 싶은 인물로 탄생한다. 


흑백이었던 영화 속 영미의 세계는 횡령에 가담한 죄로 수감된 후 출소하는 날, 총천연색으로 거듭난다. 그리고 교도소 앞에 낯선 이가 나타난다. 그의 정체는 ‘구도영 마누라’ 조유진. 세상을 향해 가시를 세우고, 결국 자신마저 그 가시에 찔리고 마는 유진은 배우 임선우의 몫이다. 근육 질환으로 목 아래를 움직일 수 없는 유진은 타인의 조력이 필요하지만 습관처럼 위악을 내세우고 만다. 단편영화 <코>, <퇴직금> 등으로 독립영화계에 인상을 남겼고, 최근 <비밀의 언덕>의 허둥대는 교사 애란 역으로 관객을 만난 그는 첫 장편 주연작에서 삼각관계의 한 축을 탄탄히 세웠다.


출소 후 갈 곳 없는 영미와 자원봉사자가 필요한 유진의 희한한 동거가 시작되며 두 사람의 세계는 서로를 간섭한다. <세기말의 사랑>은 “비장애인 여성이 장애인 여성을 질투하는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는 임선애 감독의 말처럼 삼각형의 꼭짓점에 있는 두 여자가 여러 감정으로 얽히는 이야기이면서, 자신의 힘으로 삶의 골짜기를 넘어서는 성장담이자, 시들지 않는 순정을 향한 지고지순한 믿음의 영화다. 우리 곁에서 볼 수 있는 보통의, 아니 어쩌면 조금 별난 사랑의 낯을 보여준 두 배우의 새 얼굴을 만날 시간이다. 

 

 

 

레드 컬러의 테일러드 재킷과 베스트, 테일러드 팬츠 모두 위크엔드 막스마라.

 

 

<세기말의 사랑>에 어떻게 합류했나?
유영 시나리오를 받아서 읽었는데 정말 재미있었다. 감독님 이전 작품을 찾아서 보니 그것 역시 좋았다. 그래서 참여하고 싶다고 전한 뒤 감독님을 만나 출연을 확정했다.
선우 유영 배우가 영미 역으로 확정된 상황에서 캐스팅되었다. 시나리오를 읽어보니 도전할 지점이 있는 흥미로운 역할이더라. 무엇보다 시나리오가 굉장히 재미있었다. ‘<69세> 감독님이 이런 시나리오를 썼다니 어떻게 영화를 만들까?’ 하는 궁금증을 안고 시작했다.


임선애 감독에게 캐스팅 이유에 대해 들은 바가 있나?
유영 감독님이 ‘이 배우가 연기한 적 없는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는 욕망이 있었다고 이야기했다. 영미 역할을 하는 내 모습을 보고 싶었다고. 선우 캐스팅 이유는 기억나지 않지만, 잊지 못할 일화가 있다. 감독님과 처음 만난 날 맨드라미를 한 다발 주셨다. 영화에서 중요한 소재이지 않나. 그때 태어나서 처음으로 맨드라미꽃을 봤다. 


이유영 배우는 어릴 적 부끄러움이 많고 소심한 성격이었다고. 영미에게서 어린 시절 모습을 발견하기도 했나?
유영 어린 시절 너무 소심해서 친구들과 인사도 못하고 지나가는 사람을 쳐다보지 못할 정도였다. 겁이 많고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못해 활발한 친구들을 부러워했다. ‘나도 나가서 장기자랑 하고 싶다’, ‘친구들과 어울려 놀고 싶다’는 욕망이 있었다. 어릴 때 못해본 걸 지금 다 푸는 것 같다. 영미는 어린 시절 숨어 지내던 내 모습과 정말 비슷하다.
선우 그렇구나. 나는 반대였다. 어릴 적에는 오히려 활발하고 오지랖이 넓었는데, 사춘기가 지나면서 내성적이고 소심한 성격으로 변했다. 성인이 되어서도 쭉 그런 성격이었지만 연기하면서 예전 모습이 나오는 걸 느낀다.

 

 

인물에게 다가가는 법

영화 속에서 영미가 유진을 향해 “예쁘시잖아요! 저는 이상한 여자고!”라고 외친다. 기존 이미지를 생각하면 이유영 배우가 하리라고 상상하기 어려운 대사다. 영미로 변하는 과정은 어땠나? 
유영 처음부터 걱정이 많았다. 영미는 예뻐 보이면 안 되는데 어떻게 해야 더 영미다워질지 감독님과 함께 고민했다. 덧니는 감독님이 제안한 분장인데, 여러 개를 붙여본 뒤 하나만 붙이기로 했다. 또 화장도 아예 하지 않고 맨얼굴로 촬영했다. 그럼에도 걱정이 사라지지 않더라. 그래서 사람들을 피해 목도리로 얼굴을 가리는 설정이지만, 덧니를 보이고 싶어서 일부러 치아가 드러나게 표정도 짓곤 했다. 그게 영미의 캐릭터로 각인되도록. 감독님에게 “더 못나 보이게 연기했으면 어땠을까요?” 이야기했다. 감독님은 ‘흑백 장면 이후로 영미가 달라졌으니 점점 더 예뻐지는 게 맞다’고 하더라.


영미는 사랑할 구석이 있는 캐릭터라 더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한편 유진은 목 아래로 움직일 수 없는 인물이다. 촬영 후 재활도 했다고 들었는데, 움직임을 제약하는 연기에 어려움은 없었나?
선우 거의 움직이지 못하고 휠체어에 앉아 생활하는 역할이라 몸을 제어해야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유진을 연기하면서 사람이 평소 얼마나 많은 것을 신체로 표현하는지 알게 됐다. 어떤 감정을 표현할 때 우리는 신체의 많은 부분을 사용한다. 표정만 해도 목 아래 움직임이 자유로울 때 나오는 것과 그렇지 않은 상태에서 짓는 것이 많이 다르더라. 억지로 몸을 움직이지 않고 연기하는 게 생각보다 힘들었지만, 그렇게 해서 인물에게 조금이라도 다가갈 수 있었다면 배우에게는 재활도 훈장이 아닌가 생각한다.


어느 정도로 몸이 경직되어 있었던 건가?
선우 평소처럼 몸을 자연스럽게 움직일 수 없도록 일부러 힘을 주고 있어야 했다. 그러다 보니 생각보다 많은 부분에 힘이 들어갔다. 촬영 중반부가 지날 때쯤 목이 돌아가지 않아서 힘이 과도했음을 알게 됐다. 


영미가 유진의 움직임을 돕는 과정에서 한쪽은 상대의 몸을 들어 올리고 한쪽은 자신의 몸을 완전히 맡기는 장면이 반복해 등장한다. 체력적으로 힘들지 않았나?
유영 영미가 유진을 씻기고 옷 갈아입히고 천천히 눕히는 장면은 온몸을 써서 연기해야 했다. 사람 몸이다 보니 너무 조심스러웠고 신경 써야 할 점도 많았다.
선우 연기를 하다 서로 다치면 안 되니 몸을 드는 장면에서는 리허설을 여러 번 하면서 서로 힘을 주고받는 합을 맞췄다.


두 인물의 감정이 격화하는 장면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 먼저 영미는 자신의 화상 자국을 유진에게 드러낸 이후 사촌오빠를 찾아가 처음으로 욕도 하고 울분을 터뜨린다.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다면?
유영 그 사이에 편집된 장면이 있다. 영화에서는 영미가 유진과 대화 후 사촌오빠에게 돈을 받으러 가는데, 원래 사촌오빠가 노래방 안에서 기다리고 있으라고 한다. 그 얘기를 듣고 풀이 죽은 영미는 노래방에 들어가 노래를 부른다. 가수 박영미의 ‘나는 외로움 그대는 그리움’이라는 노래다. 노래를 부르다 감정이 울컥 터져 나오는 바람에 나가서 따지는 장면인데 분량상 빠지게 되었다. 


유진은 수감 중인 도영과 화상 면회를 하다 화면보호기가 작동되자 숨죽여 운다. 그 모습이 클로즈업으로 지속되는데, 얼굴 근육만으로 슬픔을 소리 없이 표현했다. 이 장면은 어떻게 접근했나?
선우 촬영 당시 가장 부담이 큰 장면이 두 가지였다. 하나는 분장실에서 영미와 대치하는 장면이고, 또 하나가 화상 면회 신이다. 이 장면은 유진의 ‘맨얼굴’이 나와야 할 것 같았다. 유진은 위악을 부리며 사는 사람인데,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며 위악이 줄어든다. 화상 면회 장면은 그러한 위악을 전혀 부리지 않는, 유진 자신으로서 이야기하는 장면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부담이 컸다. 한편으로는 영화에서 ‘유진이 그 장면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 한 인간의 숨기지 않은 맨얼굴이 그대로 드러나는 장면 말이다.


촬영은 수월했나?
선우 카메라를 설치해두고 집중해서 한 테이크로 촬영했다. 그 장면을 밤늦게 찍었다. 테이크를 계속 가다 보면 다들 힘들어지지 않나. 그래서 더 집중해서 촬영했다.

 

 

 

더블브레스트 재킷과 와이드 팬츠 모두 위크엔드 막스마라. 첼시부츠 코스. 블랙 톱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영화가 끝나고 난 뒤

관객으로서 좋아하는 장면도 궁금하다. 개인적으로 영미가 회사에서 일하는 초반 흑백 장면을 좋아한다. 아키 카우리스마키의 영화처럼 메마른 현실에도 사랑을 놓지 않는 노동자의 모습을 담담하게 보여주지 않나.
유영 나도 초반의 흑백 장면을 좋아한다. 뒷부분을 밝게 연기한 점이 조금 아쉬웠는데, 초반의 영미 모습이 좋아서 더욱 그랬다. 그 모습을 좀 더 유지했으면 어땠을까 생각했다.
선우 영화를 볼 때마다 재미있다고 느낀 장면은 영미가 아파트 입구에서 수군대는 봉사자를 향해 몰래 침을 뱉고 확 숨을 때다. 볼 때마다 얼마나 귀여운지. 그런 귀여운 모습이 이 영화에서 중요한 것 같다. 유영 도영과 유진의 과거 장면도 좋다. 감독님이 멜로를 정말 잘 찍는다.


연기자로서 서로의 연기를 보고 감탄한 적은 언제인가?
유영 유진이 화를 많이 내지 않나. 그럴 때마다 미워 보이기보다 화낼수록 짠하고 힘들어 보였다. 언니와 연기할 때마다 유진 그 자체 같았다. 그래서 늘 잘한다고 생각했고 같이 연기하기 편했다.
선우 사실 촬영할 때 영미를 제대로 본 적이 없다. 유진은 휠체어에 앉아 있기 때문에 목소리만 들을 수 있었다. 하지만 현장에서 느낀 점이 있다면, 유영이 이번 영화에서 무척 자유롭게 연기했다는 것이다. 해방감을 느끼면서 연기하는 경험이 배우에게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연기를 잘하고 인물을 잘 구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런 자유를 배우들은 연기하며 경험해보고 싶지 않나.


인물들의 영화 이후 삶을 상상해보자. 유진은 도영이 출소한 뒤 이혼한다고 했는데, 두 사람은 이혼했을까?
선우 유진은 이혼하려 했을 것 같다.
유영 그런데 도영의 마음을 모르겠다. 도영이 할 수 있었을까? 유진도 사랑하는 것 같은데.
선우 그렇지. 유진도 조용히 사랑하지.유영 도영의 성격에 차마 못했을 것 같다.


그렇다면 도영이 영미의 돈을 모두 갚았을 때 영미는 어떻게 행동할 것 같나?
유영 도영에게 ‘당신 때문에 잘렸으니 직장을 소개해달라’고 하려나. 영미도 출소 이후 대담해졌으므로 만날 구실을 만들려고 머리를 굴렸을 것이다.
선우 끝까지 도영 옆에 끈질기게 붙어 있을 것 같다. 사실 나는 그게 더 궁금하다. 영미와 유진이 이후에 다시 만났을까?


그게 바로 마지막으로 준비한 질문이었다.
유영 원래 초기 시나리오에 쿠키 영상 같은 장면이 있었다. 영미와 유진이 60대쯤 되었을 때 서로 스쳐 지나가는 장면이다. 사는 동안 두 사람은 한 번도 마주치지 않지만, 둘 다 잘 살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영미는 일수를 놓듯 빚을 받으면서까지 도영을 지속적으로 만난다. 한결같은 마음이 순애보로 느껴졌다. 지금의 현실에서도 이런 사랑이 가능할까? 유영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많지 않을까?
선우 여전히 많은 사람이 그렇게 사랑할 것이다. 혼자 정리하고 상대를 피할 수도 있지만, 순간의 감정에 직면하고 상황을 피하려 하지 않는 사람도 있다고 생각한다. 영미가 그런 사람 아닐까.
유영 너무 좋으면 생각만 해도 좋고 그저 보는 것만으로도 좋지 않나. 나라면 오히려 고백을 미루고 마음을 드러내지 않으면서 영미처럼 더 볼 수 있는 일을 만들 것 같다.


두 사람 다 감정에 충실하구나.
유영 우리가 순수한가 보다(웃음).

 

임선우 배우는 장국영의 팬이다. 1999년으로 돌아가 장국영을 만날 수 있다면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나?
선우 ‘꺼거, 워 아이 니!(웃음)’ 고백하고 안기지 않을까. 장국영이 자기만의 색깔을 가지고 연기한 모습을 정말 좋아한다. 연기에 대한 열정으로 끊임없이 자신을 갱신했던 모습이 너무 좋다고 이야기할 것이다.


영화에서 영미는 지구 멸망을 앞둔 세기말 마지막 날 좋아하는 사람과 있기를 선택했다. 이유영 배우는 지구가 멸망하기 전날 무엇을 하겠나?
유영 사랑하는 사람들과 집에 모여 맛있는 것을 먹고 술도 마시며 파티를 하고 싶다. 최대한 즐겁게 놀 것이다.


마지막으로 올해의 활동 계획이 궁금하다.
유영 <함부로 대해줘>라는 로맨틱 코미디 드라마를 한창 촬영 중이다. 5~6월경 방송 예정인데 그 작품으로 곧 찾아갈 예정이다.
선우 현재 방영 중인 드라마 <나의 해피엔드>를 많은 사람이 사랑해주면 좋겠다. 좋은 제작진, 좋은 배우들과 치열하게 찍은 만큼 많은 사랑을 받기를 바란다. 또 <세기말의 사랑>이 개봉하니 가능한 한 많은 관객이 볼 수 있도록 배우로서 책임을 다하고 싶다.  

 

HAIR 영나(이유영), 박수정(임선우) MAKEUP 김수빈(이유영), 황보나영(임선우) STYLING 윤대연 ASSISTANT 이혜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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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DIT

EDITOR : 박지형PHOTO : 임한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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