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EOPLE 환상에 접속하다, 에바 조스팽

거대한 판지 조각으로 익숙한 장소를 낯설게 만드는 아티스트 에바 조스팽. 그가 프리즈 서울을 맞아 샴페인 하우스 루이나의 ‘카르트 블랑슈 2023’을 선보이기 위해 서울을 찾았다. 에바 조스팽이 샹파뉴를 떠올리며 축조한 세계로 걸어 들어갔다.

2023.09.22
페이스북 트위터 링크

파리 작업실의 에바 조스팽. ⓒFlavien Prioreau 

 

판지를 유심히 들여다본 적이 있는가. 주위를 둘러보면 택배 상자부터 각종 포장재 등 다양한 판지가 눈에 걸릴 것이다. 하지만 일상적인 사물일 뿐 특별한 쓰임새를 발견하는 건 어렵다. 이러한 판지에서 가능성을 발견한 예술가가 있다. 바로 프랑스의 아티스트 에바 조스팽(Eva Jospin). 단일한 색의 판지를 쌓아 올려 숲과 구조물을 만드는 것이 그의 주된 작업이다. 갈색빛 판지는 에바 조스팽을 만나 흙과 나무, 암석으로 재탄생하고, 현실과 상이한 세계를 이룬다. 2016년 루브르 박물관 안뜰에 나타난 360도 파노라마, 밀라노 막스마라 플래그십 스토어 테라스의 온실 속 미로, 디올 2023 S/S 레디투웨어 쇼의 무대 등 그의 작품은 관객을 매혹적인 공간으로 이끄는 동시에 탐험 정신을 자극한다. 에바 조스팽이 프리즈 서울 기간 내한했다. 샴페인 하우스 루이나를 위한 작품을 선보이기 위해서다. 루이나의 아트 프로젝트 ‘카르트 블랑슈 2023’의 아티스트로 낙점된 그는 메종 루이나의 포도원에서 영감을 얻어 ‘산책로’를 의미하는 ‘프롬나드(Promenade(s))’를 완성했다. 서울 코엑스의 부스 한쪽을 기괴한 숲이자 수도원으로 탈바꿈한 에바 조스팽을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Chef d’Œuvre #5 “Crayère” and Chef d’Œuvre #6 “Bassin” for the Carte Blanche PROMENADE(S) by Eva Jospin, 2022. ⓒBenoit Fougeirol 2 에바 조스팽이 제작한 루이나 블랑 드 블랑 제로보암 나무 상자. 백악갱 장식을 미니어처 형태로 조각했다. 

 

판지로 구축한 세계

프리즈 서울 루이나 라운지에 마련된 작은 방에 들어서면 암석 위에 지은 성을 연상시키는 구조물이 우뚝 서 있다. 한쪽 벽면은 고목이 빽빽한 숲이다. 가까이서 보면 이 작품의 재료 역시 판지다. 골판지 단면의 층과 기공은 나무의 결이 되었다가, 암석의 지층이 된다. 판지는 일찍이 에바 조스팽이 몰두한 재료다. 그가 처음 판지를 활용한 것은 예술 학교 에콜데보자르를 갓 졸업한 시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의 표현에 따르면 “안전한 학교에서 사회로 내던져진” 시기, 경제적으로도 어렵고 작업을 지속하기 가장 힘든 시기에 판지를 발견했다. 그것은 어디에나 널려 있고 대량으로 구하기 쉬운 재료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익숙했다. 
“예술 학교에 진학하기 전 1년간 건축을 공부했다. 건축 작업에서는 아이디어를 입체로 구현하는 모델링 과정에 판지를 사용하는데, 그때의 영향으로 미술 작업을 할 때 자연스럽게 판지를 떠올렸다. 그 자체로 아름답고, 색을 입혀 다양한 표현법을 적용할 수 있는 재료다. 건축에서는 중간 단계를 위한 도구지만, 조각 작업에 이르자 완성품이 되었다.” 작품에 다양한 층위가 존재하듯 판지 역시 여러 겹으로 구성되기에, 작품과 소재의 특성이 일치하는 점도 그의 마음에 들었다. “일반적이고 단순한 재료로 의미 있는 작품을 만드는 과정이 여러모로 흥미롭다. 평범한 것을 특별하게 만드는 과정이니까.”
숲 작업은 사전 드로잉 없이 판지를 자르며 형태를 잡는 것으로 시작한다. 칼과 가위로 하는 드로잉인 셈이다. 아랫단부터 전면부에 겹겹이 레이어를 더하며 형태를 구체화하고, 입체감이 드러나면 표면 디테일을 작업한다. 작품이 클수록 구상의 시간은 길어진다. 머릿속에서 형태와 부피감을 결정해야 조립이 가능하기 때문. 대형 작업은 수평으로 층을 쌓은 뒤 표면 재단과 샌딩(다듬기), 절단, 세부 조정, 장식 순으로 진행하고 있다. 

 

 

숲을 배경으로 한 백악갱 구조물. ⓒFlavien Prioreau

 

인공적이지만 황홀한

그가 조각 작품으로 조성한 공간은 신비롭고 비현실적인 느낌을 자아낸다. 판타지 영화 <나니아 연대기>나 <판의 미로> 속에 떨어진 것 같다. 루브르 박물관 카레 궁정에 설치한 ‘파노라마’가 대표적이다. 이 작품은 광장의 중앙 분수를 둘러싼 360도 파노라마 구조물로, 18~19세기 프랑스에서 인기를 끈 전통 파노라마를 되살린 결과물이다. 거울 외벽은 파리를 대표하는 건물을 비추는 반면, 안으로 들어서면 판지로 조성한 숲이 펼쳐진다. 황폐하고도 장엄한 단색의 숲은 폐허를 모티프로 한 풍경을 주로 그린 프랑스 화가 위베르 로베르(Hubert Robert) 작품과도 연결된다. “구조물 밖에는 도시의 경관을 담고, 내부에는 사람들이 직접 가보지 못하는 공간을 선보이고 싶었다. 19세기 초까지 유행했지만 그동안 잊힌 파노라마를 현대에 다시 살렸다는 점이 재미있었다.” 18세기 파리 사람에게 360도 파노라마 그림은 가상으로 해외를 방문하거나 역사적 사건을 체험하는 창구이자 오락거리였다. 지금의 VR 영상 이전에 물리적 몰입 장치가 존재했다.
디올 2023 S/S 패션쇼 무대와 아비뇽 교황궁 내부에 전시된 조각 작품 ‘팔라초(Palazzo)’는 덩굴과 암벽, 고딕풍 아치 등으로 구성된다. 그의 관심사는 한결같다. “인공적인 것, 인위적인 것에 특별히 매력을 느낀다. 특히 바로크식 정원을 아주 좋아한다.” 루이 14세 시기(17세기)의 베르사유 궁전 정원이 대표적인 바로크 스타일이다. 길과 수풀은 자로 잰 듯 질서 정연하고, 비를 피할 파빌리온, 연못, 인공 동굴 등이 정교하게 배치되었다. 당대 주변 유럽 궁전으로 바로크식 정원이 퍼져나갔다. “유럽 정원에는 ‘건축적 재미’라고 하는 디자인적 요소가 있다. 정원 속 작은 탑이나 다리 등 구조물은 아무 기능 없이 시각적 미학을 위해서만 존재한다.”
‘프롬나드’도 이 같은 경험을 의도한 작품이다. 관광 온 듯 낯선 장소로 들어서면 감상자는 기능성 없는 시각적 구조물을 만나게 된다. 이렇듯 에바 조스팽에게 조각은 건축과 달리 기능성은 없지만 건축물 형태를 띤 것이다. “예술 장르에서 현실적 세상을 보여주려고 거짓 디테일을 활용하지 않나. 현실과 관계 맺기 위해서는 가짜 세상을 창조해야 한다. 가짜 세상에 들어선 관객이 상상력을 펼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예술가의 역할이다.” 현실의 모방으로 상상력을 자극한다는 관점은 ‘모방을 통한 재현’을 중요시한 유럽 미술의 계보를 잇는다.
그는 패션쇼에 대한 애정도 각별하다. 디올 패션쇼 무대 디자인을 두 차례나 맡았다. 2021-2022 F/W 오트 쿠튀르 쇼에서는 가로 99m의 대형 자수 작품으로 파노라마 풍경을 펼쳐 보였고, 2023 S/S RTW 쇼에서는 거대한 판지 조각 배경을 조성했다. 그는 패션쇼 무대와 함께 유럽의 ‘축제 건축’ 역사를 소개했다. 디올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마리아 그라치아 치우리와 논의할 때 중요히 여긴 아이디어가 바로 축제 건축물이라고. 이는 역사적으로 이탈리아, 프랑스 등 여러 도시에서 특별한 이벤트를 기념하려고 한시적으로 건축물을 만든 데서 유래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도 밀라노에서 특정 기간 축제 건축 감독을 맡았다. 그때 다빈치가 무엇을 만들었을지 상상하면 놀랍지 않나? 패션쇼 무대가 현대의 축제 건축물이라는 데 둘 다 동의했다.” 짧은 시간 사람을 감탄하게 하고 막을 내리는 패션쇼야말로 축제에 걸맞으니까. 

 

 

 

작업실에서 판지를 재단하는 에바 조스팽. ⓒJoseph Jabbour

 

1 ‘프롬나드’의 숲 작업을 마무리하는 과정. ⓒLaure Vasconi 2 에바 조스팽의 드로잉 작업물. ⓒJoseph Jabbour

 

샴페인의 역사가 쌓인 장소

그렇다면 루이나의 카르트 블랑슈 2023(Carte Blanche 2023)은 어떤 아이디어에서 출발했을까? ‘카르트 블랑슈’는 단어 그대로 해석하면 흰 종이, 자세히는 ‘전권을 맡기는 백지 위임장’을 뜻한다. 루이나는 2008년부터 샴페인 하우스의 철학과 유산을 예술 작품으로 재해석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해왔으며, 이때 아티스트에게 작업을 전적으로 일임한다. 에바 조스팽은 프로젝트를 위해 루이나가 탄생하는 샹파뉴의 몽타뉴 드 렝스를 찾았다. 각기 다른 계절에 포도원과 셀러를 여러 차례 방문했다. “사실 샴페인에 대해 아는 것이 많지 않았다. 와인의 일종이며 고유한 특징이 있다는 정도였다. 하지만 샹파뉴에서 많은 것을 배웠다. 포도가 수확되기까지 어떤 단계를 거쳐 변화하는지, 와인 생산 과정에 깃든 인간의 행위는 무엇인지를.” 그 결과 뒤얽힌 포도덩굴은 빽빽한 숲과 유기적인 자수 작품으로, 셀러가 있는 지하 백악갱은 거대한 구조물로 재탄생했다. 나아가 샹파뉴라는 지역은 샴페인의 유구한 역사가 축적된 장소다. 그는 ‘프롬나드’가 메종 루이나의 테루아뿐 아니라, 샹파뉴 전체의 경관을 드러낸다고 강조했다. “나는 파리지앵이다. 서울과 마찬가지로 파리는 다양성이 공존하는 공간이다. 그러나 샹파뉴는 샴페인을 기반으로 지역의 역사가 쌓여온 곳이기에 도시와의 대비를 보여주고 싶었다.” 셀러 마스터 프레데릭 파네오티스와의 대화에서도 힌트를 얻었다. “생산자는 여러 빈티지 가운데 최고의 해를 선택해 위대한 와인이 될 것으로 예측한다. 환상적인 일이다. 샴페인을 만드는 과정은 자신의 선택을 믿는 인간의 행위가 축적된 결과라고 생각한다.” 루이나의 팬이라는 그에게 샴페인의 의미를 묻자, 애정 어린 답변이 돌아왔다. “‘샴페인을 터뜨린다(pop the champagne)’는 관용구가 나타내듯 축하를 위한 술이라는 인식이 강하다.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프랑스에서는 식전주로 흔히 마시며, 특별한 일이 있을 때 저녁 식사 내내 곁들이기도 한다. 그렇다면 사실 모든 순간과 어울리는 술이 샴페인 아닐까?”

 

 

 

디올 2023 S/S 패션쇼 무대를 위한 설치 작업. ⓒAdrien Dirand

 

꿈의 정원을 향하여

‘프롬나드’는 지난 3월 파리에서의 첫 전시 이후 프리즈 서울에서 많은 사람을 만났고, 이어 다양한 국제 아트페어에서 선보일 예정이다. 샹파뉴의 역사를 담은 작품은 세계인에게 어떤 감탄을 일으킬까. 에바 조스팽은 앞으로도 여러 작품으로 놀라움을 선사할 작정이다. 먼저 파리에 새롭게 개통하는 지하철역에 상설 설치 작품을 준비 중이다. 건물의 파사드를 장식하는 공공미술로, 이번에는 단단한 소재인 콘크리트와 브론즈를 활용했다. 두 번째 프로젝트는 필립 로스의 소설 <미국의 목가>를 각색한 연극 ‹폭력의 숲(Violence Forest)›의 무대 디자인이다. 원작 주인공인 스위드 레보브가 아닌 딸 메리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되며, 베트남 전쟁에 반대해 폭탄 테러를 일으킨 인물을 통해 폭력의 원인과 역할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이때 에바 조스팽이 판지 숲으로 제작한 무대는 변화무쌍한 세계의 은유로 기능한다. 이 연극은 오는 11월 스위스 로잔에서 첫 무대를 연 뒤 제네바를 거쳐 파리로 순회한다.
메종 루이나 정원에서 열리는 전시도 기다리고 있다. 다른 아티스트와 함께 상설 작품을 선보일 예정이다. 미술관뿐 아니라 정원이나 광장, 무대, 옛 건축물, 공공시설 등 다양한 장소를 전시장으로 활용한 그에게 이상적인 전시 공간은 어디인지 물었다. 그러자 뜻밖의 답이 이어졌다. “사실 작품을 전시하고 싶은 곳이 하나 있다. 아주 멋진 곳인데 지금은 말할 수 없다. 아마 내년 봄쯤 근사한 장소에서 내 작품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꿈꿔왔던 공간에서의 작업이라, 곧 나의 꿈이 현실이 되길 바란다.” 그의 궁극적인 드림 프로젝트는 ‘나만의 정원’을 만드는 것이다. “나의 조각과 자연이 어떻게 상호작용하는지 선보이고 싶다”는 그의 정원은 어떤 모습일까. 시공간을 짐작할 수 없는 매혹의 장소 아닐까? 지금의 왕성한 활동력이라면 그가 이룬 꿈의 정원도 머지않아 볼 수 있을 것만 같다.   

 

cooperation 엠에이치샴페인즈앤드와인즈코리아

 

 

 

 

 

 

 

 

 

 

더네이버, 피플, 인터뷰

CREDIT

EDITOR : 박지형PHOTO :

아이매거진코리아닷컴, 더네이버, 동방유행 ©imagazinekorea.com, ©theneighbor.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