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속되는 팬데믹 상황에 발 빠르게 적응한 패션계는 기존 오프라인 패션쇼를 다양한 형태의 디지털 방식으로 전환했다. 스타일리시한 패션 피플과 수많은 취재진으로 북적거리던 풍경, 기대감과 환호로 들뜬 쇼장의 후끈한 열기는 사라졌지만, 디자이너들은 새로운 볼거리로 방구석 프런트로에 앉은 전 세계 관객의 눈을 사로잡았다. 

패션위크 기간, 수백 명 관중 앞에서 진행하던 오프라인 패션쇼는 정해진 스케줄, 한정된 시간 안에 공들여 준비한 컬렉션을 선보여야 한다는 어쩔 수 없는 제약이 있었다. 패션쇼 장소 역시 취재진을 비롯한 관객이 쇼와 쇼 사이의 빈 시간에 이동할 수 있는 동선을 고려해 정하는 것이 그간의 암묵적인 룰. 하지만 디지털 매체의 눈부신 발전과 팬데믹이라는 전대미문의 상황에서 강제된, 관객이 없는 온라인 패션쇼는 역설적으로 패션 하우스로 하여금 장소와 시간의 제약에서 벗어나 그들의 크리에이티브를 마음껏 펼칠 수 있는 계기가 됐다. 단 한 번(종종 한 장소에서 시간대를 나눠 두 번 진행하는 브랜드도 있지만)의 쇼에서 모든 것을 집약해 보여주어야 하는 오프라인 쇼의 생생함과 긴장감은 사라졌지만, 사전 제작을 통해 더욱 정제되고 완벽에 가까운 영상을 보여줄 수 있다는 것도 장점이라면 장점일 터. 런웨이에서 워킹하던 모델이 넘어지거나, 시작 시간이 한참 지연돼 포토그래퍼들이 야유를 쏟아내는 진땀 나는 해프닝도 없을 테니 말이다. 

디자이너들은 쇼장을 벗어나 더 넓은 세상으로 향했고, 관중은 각자의 시간과 공간에서 편안하고 안전하게 새로운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었다. 미우치아 프라다는 이탈리아 북부 돌로미테 알프스로 미우미우 걸을 불러 모았다. 웅장한 산세와 끝없이 펼쳐진 설원이 어우러진 코르티나 담페초(Cortina d’Ampezzo) 스키 리조트의 풍경은 그 자체로 탄성을 자아냈고, 스포티함과 로맨틱함, 과감함과 연약함을 넘나드는 의상은 당장이라도 ‘미우미우 마운틴 클럽’에 가입하고 싶을 만큼 매력이 넘쳤다. 미우치아 여사는 설원에서 펼쳐진 이 전례가 없는 패션쇼를 통해 미지의 목표를 향해 나가는 모험과 극한에 도전하는 용기, 그리고 유대감과 연대감이라는 메시지를 효과적으로 전달했다. 생로랑의 수장 안토니 바카렐로 역시 숨 막히는 대자연을 배경으로 <WHERE THE SILVER WIND BLOWS>라는 제목의 런웨이 필름을 제작했다. 촬영 장소는 바로 아이슬란드. 영상을 촬영하기 위해 프랑스에서 모델과 촬영 팀을 포함한 100여 명의 스태프가 아이슬란드로 이동했는데, 현지 방역 지침에 따라 2주의 자가 격리 기간을 거쳤다고. 엘드흐뢰인 이끼 지대(Eldhraun lava field)부터 신비로운 스코가포스 폭포(Skógafoss waterfall), 레이니스피아라 해변(Reynisfjara beach) 등 검은 모래와 이끼, 빙하, 파도, 폭포 등 아이슬란드 곳곳의 비경이 화면을 가득 채웠고, 비비드한 컬러, 메탈릭 소재가 어우러진 64벌의 로큰롤 룩은 경이로운 풍경과 대비를 이뤄 더욱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전위적이고 실험적인 릭 오웬스의 의상들도 이탈리아 북부 베네치아 해변의 정취와 어우러져 더욱 비현실적이고 영화 같은 장면을 선사했다.  

관광객으로 가득했던 역사적, 문화적 장소도 패션쇼 베뉴로 변신했다. 디올은 베르사유 궁전 거울의 방을 배경 삼아 컬렉션을 선보였고, 셀린느는 파리 남동쪽에 위치한 보르비콩트성의 정원을 런웨이 삼아 새 시즌의 컬렉션을 소개했다. 루이 14세 통치 시기 막강한 권력을 누리던 니콜라 푸케의 성 보르비콩트와 그의 성을 질투한 루이 14세가 자신의 권력을 과시하기 위해 더 화려하게 지은 베르사유 궁전. 이 두 장소가 같은 시즌 다른 패션 하우스의 선택을 받았다는 점도 재미있다. 루브르 박물관의 미켈란젤로 갤러리를 패션쇼 무대로 꾸민 루이 비통의 2021 F/W 컬렉션도 흥미로웠다. 포르나세티의 독특한 시각적 세계와 루이 비통의 미래 지향적인 창의성, 그리스 로마 시대에서 영감을 받은 의상과 액세서리가 미켈란젤로 갤러리의 그리스, 에트루리아, 로마 조각상을 배경으로 빛을 발했다. 

일상의 회복을 바라는 디자이너들의 바람이 묻어나는 쇼 베뉴도 눈길을 끈다. 올해로 창립 40주년을 맞은 마이클 코어스는 팬데믹으로 막대한 피해를 입은 공연 예술계의 부활을 기원하는 마음을 담아 브로드웨이 거리와 극장을 런웨이로 패션쇼를 펼쳤다. 록다운으로 한동안 문을 닫은 피콜로 테아트로 디 밀라노(Piccolo Teatro di Milano)의 문을 열고 교향악단의 연주와 함께 패션쇼를 연 발렌티노의 의도도 그와 일맥상통한다. 올리비에 루스테잉은 75년 전 미국에서 첫 프레젠테이션을 연 프랑스 쿠튀리에 피에르 발맹에 대한 경의를 담아 발맹 아미를 에어프랑스에 탑승시켰다. 루스테잉식 젯셋 룩을 입고 국경을 넘어 우주를 자유롭게 여행하는 발맹 아미들의 모습에서 다시 자유로운 이동이 가능해질 팬데믹 이후에 대한 기대감이 느껴졌다. 파리의 전설적인 나이트클럽 셰 카스텔(Chez Castel)에서 패션쇼를 진행한 샤넬의 버지니 비아르나, 리브고쉬 정신을 기리며 생제르맹 거리에서 끌로에 데뷔 쇼를 연 가브리엘라 허스트도 과거의 찬란했던 순간들에 대한 그리움과 경외를 컬렉션 베뉴에 은유적으로 녹여낸 것이 아닐까 추측해본다. 

누구도 의도치 않았지만, 쇼가 사라지고 디지털 방식이 진보한 덕분에 더 많은 이들이 쉽게 패션쇼를 접할 수 있게 된 것은 어찌 보면 반가운 일. 하지만 영상을 통해 만나는 황홀한 패션 판타지에 심취해 있다가도, 불현듯 쇼장의 뜨거운 열기와 팽팽한 긴장감에 대한 그리움이 밀려오는 것이 사실이다. 백신 접종이 속도를 내면서 유럽의 패션 하우스들은 다시 소수의 관객을 초대해 조심스럽게 오프라인 패션쇼를 진행하기 시작했지만, 이미 디지털 패션쇼라는 새로운 방식을 체득한 패션 하우스들이 팬데믹 이후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지는 조금 더 지켜봐야 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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